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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2-09 18:10
Rolling Stones (롤링 스톤즈)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86  



Rolling Stones (롤링 스톤즈)
 


 
롤링 스톤즈(The Rolling Stones)는 같은 시대를 이끌어가던 비틀즈보다 록적 성향이 강한 사운드와 독특한 음악적 개성을 지닌, 그리고 다른 어떤 백인 뮤지션들보다 짙은 공감대로 미국 흑인의 리듬 앤 블루스를 자신들의 음악에 흡수한 밴드이다. 한때 그들은 흑인 아티스트들의 냄새가 물씬한 성적 분위기를 연출하다가 후에는 양성적인 이미지로 바꾸기도 했다.


무례하고 반항적이며 난폭하고 불순한 이미지를 만들어낸 롤링 스톤즈는 본성을 가장 솔직히 드러낸 밴드로 부각된다. 현란하고 난폭하며 허세를 부리는 무대매너를 보여준 믹 재거의 재능과 리처드의 강렬한 기타연주에 힘입어 공연밴드로서의 명성을 확고하게 다진 이들은 65년에 'Satisfaction'이라는 걸작을 발표하며 유일하게 비틀즈에 필적할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런던 상과대학의 학생이었던 재거는 리틀 블루와 블루 보이즈라는 밴드에서 연주활동을 하던 중 어린 시절의 친구였던 키스 리처드와 일링클럽의 전속 밴드에서 일하던 브라이언 존스를 만나 의기 투합, 밴드를 결성한다. 62년 봄에 실버 롤링 스톤즈(Silver Rolling Stones)라는 이름으로 마키 클럽에서 데뷔한 이들은 12월에 오디션을 통해 베이시스트인 빌 와이먼을 영입한 이후 리듬 앤 블루스와 로큰롤, 그리고 흑인 소울을 혼합한 당시로서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이 때의 멤버는 재거와 리처드, 존스, 와츠, 와이먼, 스튜어트로 이들은 R&B 클럽 등지를 찾아 연주활동을 펼쳤으며 리치먼드에 있는 크로태디 클럽에서 8개월 고정 출연을 확보하여 이곳을 중심으로 그들의 추종자들을 늘려간다.


4월에는 앤드류 올드햄을 매니저로 영입해 데카 레코드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첫 싱글로 발표한 'Come Me on'이 63년 6월에 모국에서 소폭의 히트를 기록한다. 이 무렵 스튜어트가 밴드에서 추방당하지만 스튜디오 작업시에는 계속 참여하였고 결국에는 공연 매니저를 맡기도 한다. 9월에는 에벌리 브라더즈와 리틀 리처드의 보조 밴드로 함께 공연을 하는 한편 12월에는 비틀즈의 존 레논과 폴 맥카트니의 작품인 'I Wanna Be Your Man'을 받아 발표했다.


64년부터 재거와 리처드는 'Get off My Cloud', 'As Tears Go by', '19th Nervous Breakdown'같은 60년대를 대표하는 일련의 걸작들을 창조하며, 비틀즈의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에 버금가는 작곡 팀웍을 과시하였고 비틀즈와 명백히 대조적인 이미지와 음악으로 팬들을 확보하면서 전파매체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64년 4월에는 버디 홀리(Buddy Holly)의 'Not Fade away'를 리메이크해 롤링 스톤즈의 이름이 미국 차트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The Rolling Stones]라는 타이틀로 발매된 데뷔작은 'Walking The Dog', 'I Just Want To Make Love To You', 'Can I Get A Witness'와 'Tell Me' 등 미국적인 R&B풍 사운드를 보여주었다. 이들은 6월에 최초의 순회공연을 벌였으며 이어서 [12x5]를 발표해 'It's All over Now'와 이들의 고전이 된 'Time Is on My Side'를 히트시킨다. 그러나 평론가와 미디어는 그들을 '제 1차 브리티쉬 인베이션'과는 무관한 이단적인 밴드로 취급했다.


65년 초에 발표한 [Now!]에서는 'Heart of Stone'이 주요 히트를 하였고 대부분의 녹음을 시카고에서 수행한 [Out of Our Head]는 롤링 스톤즈의 이름을 미국은 물론 전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된다. 최초의 골드앨범인 본작은 가장 롤링 스톤즈적인 명곡 'Satisfaction'(65년 7월 10일부터 4주간 싱글챠트 정상. 이들의 최초의 빌보드 싱글챠트 1위곡)을 비롯해 'The Last Time', 'Play with Fire' 등을 담고 있다.


밴드의 리더이며 가장 뛰어난 뮤지션이었던 브라이언 존스의 비범한 예술적 재능에 힘입어 [aftermath]는 당대 최고의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위협적인 마력을 지닌 본작에서 그들은 'Paint It Black'(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풀 메탈 자켓]의 주제곡으로도 쓰임), 남녀차별적인 의식이 담긴 'Stupid Girl', 'Under My Thumb' 등을 크게 히트시키며 온화한 발라드를 배격하는 대신 컨츄리 앤 웨스턴류의 음악들도 훌륭하게 취입할수 있는 능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비틀즈의 [Sgt.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의 모방작인 [Their Sataic Majesties Request]를 발표함으로써 사상 최고의 악평과 수모를 당하며 비틀즈의 혁명적인 업적에 빚을 지게 되었다.


'Satisfaction' 이후 최고의 싱글로 간주되는 68년작 'Jumping Jack Flash'로 간신히 신용을 되찾은 이들은 가장 응집력 있는 작품으로 인정받은 [Beggar's Banquet]을 발표했고 여기서 'Street Fighting Man', 'Sympathy for The Devil' 등이 히트한다.

그러나 이렇게 밴드의 인기가 절정에 달하던 60년대 말은 백인이면서 흑인 소울과 R&B 스타일을 구사하며 괴팍스러운 행동을 일삼는 롤링 스톤즈에 대해 보수적인 영국 기성 세대와 매스컴들의 악의 또한 극에 달한 시절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혐오스러운 헤어스타일을 고치라며 이발소 단체가 헤어 커트를 보낸 일도 있다고 한다. 또 멤버 대부분이 마약 복용과 소지 혐의로 법원에 고소되기도 하고 브라이언 존스가 정신 질환과 약물 복용으로 인해 병원에 입원하는 등 말썽이 끊이지 않았다. 69년에 이르러서 존스는 결국 건강과 음악적 견해차이로 밴드를 탈퇴했으며 한달후 자신의 집 야외 수영장에서 익사체로 발견됨으로써 25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다. 초창기 믹 재거를 압도하며 밴드의 구심점으로서 롤링 스톤즈의 음악을 주도했던 젊은 천재의 비극적인 죽음이었다.


존스의 빈 자리에는 메이올 밴드의 멤버였던 믹 테일러가 들어섰고 롤링 스톤즈는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 25만여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존스의 죽음을 애도하는 공연을 연다. 이어서 10월에 미국 순회 공연을 가진 이들은 이번엔 노스캐롤라이나의 앨터몬트 스피드웨이에서 무료 공연을 계획하는데 공연 도중 사상 최악의 사건이 발생하면서 밴드를 붕괴위기로 몰고 간다. 이 공연은 애초부터 준비가 부실했던 데다가 멤버들이 1시간여나 무대에 나타나지 않는 무성의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관객은 잔뜩 흥분해 있었다. 한참동안 지연되던 공연이 마침내 시작되고 'Sympathy for The Devil'이 연주되는 동안 맨 앞줄의 한 관중이 칼에 찔려 피살되는 비극적인 돌발사건이 벌어진다. 관중들은 히스테릭하고 추악한 혼란을 휩싸였고 언론 매체들은 일제히 '우드스탁 정신의 죽음'이라며 혹평과 비난을 퍼부었다. 그 공연은 롤링 스톤즈의 신뢰도와 성실성에 대한 의구심을 몰고왔으며 극단적인 비판속에 관중으로부터 밴드를 격리시키라는 항의가 대두되기에 이르른다. 이후 롤링 스톤즈는 'Sympathy for The Devil'을 6년 동안 단 한번도 연주하지 않았지만 72년 말에 발표된 엘터몬트 공연의 영화음반인 [Gimme Sheler]에는 이 때의 살해사건이 그대로 재현되어 다시금 팬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이 사건으로 여러해 동안 순회공연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You Can't Always Get What You Want'를 비롯해 코러스 부분에 살인과 능욕에 대한 역설적인 내용을 다룬 'Gimme Shelter', 폭력적인 남녀차별주의를 노래한 첫 번째 작품 'Midnight Rambler' 등을 수록한 [Let It Bleed]로 순식간에 베스트셀링을 기록하며 다시금 인기를 되찾아간다.

믹 재거가 영화 [Performance]에 주연으로 출연함으로써 밴드는 70년경에 잠시 활동을 중지했다가 71년 세금에 얽힌 문제로 인해 영구히 영국을 떠날 것을 선언하고 영국 순회공연을 벌였다. 비틀즈가 해체한 뒤 '세계 최고의 록밴드'라는 명성을 얻기 시작한 롤링 스톤즈는 71년 자신들의 레코드사를 설립, 70년대를 통해 다양한 음악형식에 도전하였으며 컨츄리 스타일의 'Wild Horses', 'Dead Flowers', Sister Morphine', 그리고 인종차별과 남녀차별을 여과없이 드러낸 'Brown Sugar'를 담은 [Sticky Fingers]를 발표한다. 이때까지 이들의 공연은 음악적인 연주보다는 문화적인 사건들로 평가되는 경향이 농후했다.


71년에 믹 재거는 비앙카 드 마시아스와 결혼하면서 상류사회에 합류했고 72년에 재개한 순회공연이 크게 성공을 거두면서 롤링 스톤즈 최후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Exile on Main Street]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후 발표한 작품들은 레게와 디스코같은 성인 취향의 2류작 모음에 불과한 졸작으로 여겨졌다. 자신들의 난폭한 기질을 노래해 악명높은 'Star Star(Starfucker)'를 수록한 [Goat's Head Soup]이나 [It's Only Rock N' Roll]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다만 73년 10월에 1주간 차트 1위에 올랐던 'Angie'만이 명성의 명맥을 유지시켜주었다.


74년 12월에는 브라이언 존스의 후임으로 들어왔던 믹 테일러가 팀을 떠나고 로드 스튜어트가 이끌던 페이시스의 기타리스트인 론 우드가 75년의 순회공연을 위해 그 자리에 들어섰다. 그러나 77년 토론토에서 키스 리처드가 다시 한번 마약사건으로 피소됐다가 자선 공연 개최를 조건으로 풀려나고 이전 멤버였던 토니 산체스가 롤링 스톤즈 멤버들의 문란한 행위를 자극적으로 묘사한 책 [Up And Down with The Rolling Stones]가 논란을 일으키면서 밴드의 명성은 또다시 커다란 타격을 입는다.


하지만 디스코풍 넘버 'Miss You'의 히트에 힘입어 [Some Girls]는 78년과 79년 사이에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제작이 많이 지연됐던 [Emotional Rescue]는 10여년만에 발표한 걸작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Tattoo You] 또한 크게 히트하며 81년에 가졌던 순회공연은 당대 최고의 흥행수입을 올린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후 1∼2년마다 한번꼴로 꾸준히 앨범을 발표하며(물론 평가는 예전만 못했지만) 30년 넘게 밴드를 유지하며 장수하고 있는 그들은 1년여 전에 신작을 발표하고 벌인 투어공연에서 메탈리카를 제치고 98년 콘서트 흥행 수입 1위를 기록하는 저력을 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