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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2-09 17:53
Roberta Flack (로버타 플랙)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62  



Roberta Flack (로버타 플랙)

 


세련되고 도시적인 이미지, 차분하고 감미로우며 고급스럽다는 일련의 수식어들로 대표되는 R&B 보컬리스트 로버타 플랙(Roberta Flack)은 1970년대를 대표하는 흑인 여성 싱어로 팝, 록, R&B 등을 망라하며 이지 리스닝 계열의 대표주자로 롱런하고 있는 아티스트이다.


로버타 플랙(Roberta Flack)이 1990년대의 음악 팬들에게 알려진 것은 힙합 트리오 더 퓨지스(The Fugee)의 공헌이 컸다. 이들의 걸작 [Score]에는 로버타 플랙의 대표곡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을 댄서블하게 재해석한 "Killing me softly"가 수록되어 있어 이 곡을 통해 젊은 신세대들은 로버타 플랙과 상견례를 가졌다.


"American pie"와 "Vincent"로 유명한 포크 싱어 송라이터 돈 맥클린(Don McLean)의 노래하는 모습에 감동한 작곡가 찰스 폭스(Charles Fox)와 노만 김벨(Norman Gimbel)이 만든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은 1988년 "Nite & day(7위)"라는 히특곡을 낸 흑인 남성 싱어 알 비 슈어(Al B. Sure)가 퓨지스와 같은 제목인 "Killing me softly(80위)"로 1989년에 반짝 인기를 얻은바 있었다. 이 노래로 1970년대 초반 당시 로버타 플랙의 명성은 높아졌고 그녀의 인기는 한지에 먹물 퍼지듯 전 세계에 급속히 번져나갔다.


1939년 2월 10일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난 로버타 플랙은 교회 오르간 연주자의 딸로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연주하였다.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하기도 한 그녀는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클럽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로버타 플랙은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의 생활을 접고 서른의 나이에 본격적인 풀타임 뮤지션으로 궤도를 수정했다.


우연히 그녀의 음악을 들은 재즈 뮤지션인 레스 매칸(Les McCann)에게 발탁되어 [애틀랜틱(Atlantic)] 레이블과 음반 계약을 체결, 정식 가수의 길을 걷게 된 로버타 플랙의 1969년의 데뷔 앨범 [First Take]는 리듬 앤 블루스와 재즈적인 감각이 몸에 벤 명 프로듀서 조엘 돈(Joel Dorn)의 도움으로 공개되었다. 그래서 그녀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리듬 앤 블루스이지만 재즈의 감성이 두드러진다. 로버타 플랙은 [First Take]와 [Chapter Two](70)로 호평을 받긴 했으나 그다지 대중들에게 어필하진 못했다.


그러나 72년 [First Take]에 수록되었던 이완 매콜(Ewan MacColl)의 곡을 로버타 플랙이 새롭게 편곡한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가 영화에 삽입되면서 그 해 차트 넘버원의 빅히트를 기록했고 그녀는 팝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과 함께 그녀의 명곡으로 양대 산맥을 이루는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는 느긋하고 나른한 재즈의 숨결을 담아낸 리듬 앤 블루스의 고전이다. 재즈 매니아로 알려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과 주연을 맡아 제작비를 절감한 1971년도 영화 <어둠 속의 벨이 울릴 때(Play Misty For Me)>에 이 곡을 사용한 것이다.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는 영화의 성공에 힘입어 1972년에 6주 동안 싱글 차트 1위를 지켰다.


이후 그녀의 대학 동창인 도니 해더웨이(Donny Hathaway)와 함께 취입한 "Where Is The Love?"도 같은 해에 5위를 기록하면서 1973년 그래미에서 올해의 레코드(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와 올해의 듀오나 그룹(Where Is The Love)을 수상하게 된다. 프로 데뷔 4년만에 이룬 쾌거였다.


1973년에는 5주 동안 차트 정상을 지킨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으로 2년 연속 그래미 올해의 레코드를 수상하는 영광을 차지했고 최우수 여자 가수 부문도 수상했다. 이렇듯 1970년대 초반부터 후반까지는 로버타 플랙의 전성기였고 이러한 그녀의 히트 퍼레이드는 1980년대 초반까지 유지되었다. "At seventeen"의 주인공인 포크 싱어 송라이터 재니스 이안(Janis Ian)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Jesse(30위)"는 국내 라디오에서 꾸준한 신청 엽서를 받았으며, 세 번째 1위곡 "Feel like makin' love", 도니와 다시 호흡을 맞춰 발표한 앨범 [Blue Lights in the Basement]의 아름다운 발라드 "The closer I get to you(2위)", "If ever I see you again(24위)", 그녀의 음악 중에서 가장 펑키(funky)한 "Back together again(56위)", "Making love(13위)", 그리고 1983년 국내에서 엄청난 사랑을 받은 피보 브라이슨(Peabo Bryson)과의 듀엣곡 "Tonight I celebrate my love(16위)" 등이 그녀의 인기를 든든하게 받쳐 주었다.


1980년대 초반 이후 로버타 플랙의 활동은 극히 미진했다. 공연 활동에 치중하여 때로는 오케스트라와, 때로는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같은 재즈 뮤지션과 함께 연주 활동을 한 로버타 플랙은 새로운 파트너를 맞이한다. 1979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음악 동지 도니 해더웨이와 두 번째 단짝 피보 브라이슨에 이어 선택한 그녀의 세 번째 파트너는 1990년 "Close to you"로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을 경험한 영국 출신의 레게 뮤지션 맥시 프리스트(Maxi Priest)였다. 그들은 스타쉽(Starship)이 1987년에 발표한 앨범 [No Protection]에 수록된 숨겨진 보석 "Set the night to music"을 선택했다. 현재 몸값이 가장 비싼 작곡가중 한 명인 다이안 워렌(Diane Warren)의 작품을 리메이크한 이 곡이 1991년 6위에 랭크되면서 로버타 플랙은 다시 부활했고 그 여세를 몰아 1993년 12월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차분한 내한 공연을 가져 그녀의 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낭만적이고 밝은 재즈 발라드로 70년대를 주름잡았던 로버타 플랙은 1997년 [Christmas Album]을 발표하기까지 90년대 들어서는 그다지 활발한 레코딩 활동을 하고 있진 않지만, 감정이 절제된 차분한 스타일로 MOR(Middle of the Road, 성인취향의 현대음악을 가리키는 말) 음악의 정수를 보이며 싱어송라이터, 편곡자로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흑인 민권 운동과 소울 음악으로 흑인들의 자긍심이 하늘을 찌르던 1960년대 후반에 정식으로 데뷔한 로버타 플랙은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음악을 만들지 않았다. 음악 소재는 항상 '사랑'이었기에 급진적이고 예민한 정치, 사회적인 가사는 그녀의 노래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 결과 로버타 플랙은 백인들에게도 환영받았고 제도권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그래미에서 올해의 레코드를 2년 연속으로 수상하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일부 음악 평론가들은 로버타 플랙의 음악을 흑인의 정신, 즉 소울이 없이 예쁘게만 포장된 음악이라며 평가절하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영원한 믿음인 '사랑'의 이름으로 모든 사람들을 아무 편견과 차별 없이 받아들였다. 결국 그녀는 증오와 갈등이 흑인과 백인의 마음을 지배하던 혼란과 불신의 시대에 믿음과 사랑의 씨앗을 심은 '수호천사'였다.